LE TEMPS-ESPACE DE RUINES
A propos du « temps-espace en surplus »,
photopraphies de Sang-Hyun Hong

L’espace n’est pas la totalité des objets visibles. Il n’est ni un autre objet, le tout qui les engloberait, mais le lieu primordial où toutes les expérience se déroulent, sans quoi elles ne peuvent même pas se mettre au commencement, et qui nous apparaît avant que notre conscience identifie ou fixe en elle-même les objets: le lieu qui, en tant que condition d’expérience, se déploie avant la mise en œuvre de la conscience. Cette non-objectivité de l’espace, nous en témoignons en laissant celui-ci s’infiltrer en nous-mêmes. Ce « signal » de l’infiltration de l’espace, peut-être Martin Heidegger l’appelle-t-il « émotion »(Gefühl) ou « état d’âme »(Stimmung). L’espace n’est pas une chose que nous puissions saisir dans la conscience active, mais la résonnance spatiale qui retentit en nous de manière à nous faire retourner à la passivié promordiale.

Cette résonnance de l’espace, le fait que, non fixé dans la conscience ou les yeux, il se propage, comme une sorte d’énergie, en nous, c’est en effet la trace invisible, quelque chose de temporel plutôt que de spatial. Dans le fait que l’espace devient ainsi le déploiement du temps lui-même, la résonnance temporelle ou, si on peut dire, une sonorité privée de son(la musique de l’être), se trouve toute la possibilité ou l’impossibilité de l’art photographique, et c’est pourquoi, pour Henri Cartier-Bresson, l’essence de cet art — qui, en tant qu’art représentatif par excellence, doit être destiné à représenter l’espace et les choses spatiaux — cosiste paradoxalement à saisir un absolument insaisissable, le temps lui-même en dehors de la représentation, c’est-à-dire « l’instant décisif ». L’art photographique, l’art d’imitatio est sans doute l’art quii est beaucoup plus représentatif que peinture ou sculpture, mais dont la possibilité(l’impossibilité) n’est rien d’autre que la possibilité(l’impossibilité) de saisir ce qui, étant invisible ou l’invisibilité elle-même, est on ne peut plus insaisissable, le temps fuyant réfractaire à toute représentation. L’art représentatif par excellence se soumet à ce qui s’éloigne infiniment de la représentation. Cela veut dire que l’art photographique doit « présenter » — et non représenter — l’arrivée du temps à partir des choses visibles(représentables), c’est-à-dire dans la différence de celle-ci que cet art pose à leur égard.

La série de photographies que Sang-Hyun Hong nous présente sous le titre du « temps-espace en surplus » est le résultat d’une réflexion sur l’événement ontologique, sur le-devenir-le-temps de l’espace(la présence temporelle de l’espace, la cristallisation de l’espace dans le temps). Elle revient à nouveau à la question de la possibilté de cet art.

Dans les photographies crées par Sang-Hyun Hong, quel espace « résonne » ou « parle »? Quel temps peut être « vu »?

C’est l’espace de ruines, le temps de ruines, enfin le temps-espace de ruines. Certes, dans « Le temps-espace de ruines », nous sommes en face des espaces inhabités, détruits, et des temps arrêtés dans le passé. Les espaces effondrés, les temps immobiles, le temps-espace de ruines, mais il ne nous apparaît pas finalement comme ruiné, mais étrangement comme quelque chose de vivant, comme une « nature vivante ». Cela signifie qu’il ne met pas en relief le romantique ou le tragique subjectif des ruines qui s’oppose « dialectiquement » au temps-espace réel et quotidien où on s’efforce de satisfaire ses besoins et ses plaisirs. Il se focalise sur le centre vide ou le vide central en noir et blanc(ce noir et blanc qui est, dans « Le temps-espace en surplus », visible et invisile à la fois), sur l’obscurité silencieuse qui tombe dans cette ville, sur l’abandon de soi(ou l’ouverture sur l’ouverture elle-même) qui diffère d’une résignation. En effet, Hong a déjà figuré ce vide central, dans « Les variations pour l’architecture et l’espace », œuvre précédente au « temps-espace de ruines en surplus», dans le rayon blanc du ciel que nous pouvons voir au sein des tours, au centre de toutes les images. Cependant, dans « Le temps-espace de ruines », ce vide central n’a pas de centre. Il est disséminé partout. À proprement parler, en tant que temps de l’œuvre, il nous « parle » ou « résonne » en nous plutôt que de se démontrer directement dans les figures visibles. Mais ce temps de l’œuvre…, ce n’est pas seulememt le temps que l’auteur a rencontré autrefois, mais aussi le temps que nous envisageons maintenant, sinon la vie elle-même du « nous », des anonymes. Le centre vide qu’entoure la civilisation urbaine capitaliste, qui, toutefois, ne saurait en être atteint, une « nature » qui s’en retourne sans s’y opposer tragiquement, le noyau qui se présente comme indestructible, comme en dehors de toute appropriation.

Joon-Sang Park
(Professeur de philosophie à l’Université Soong-sil à Séoul)

폐허의 시공간

1
홍상현은 2008년 첫 개인전 “건축공간변주”를 선보였었고, 금년 2월 말 자신이 입주 작가로 있는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열린 소규모 전시 “비극의 변주”를 통해 자신의 시선이 움직여왔던 궤적을 다시 보여주기 시작했다. 첫 번째 전시의 이미지들에서 우리는 밑에서 위로 잡은 앵글에 들어온 고층 건물들 중앙에 나타난 백색의 하늘을 볼 수 있었고, 두 번째 전시의 이미지들에서 거의 ‘극사실주의적’으로 표현된, 연평도 포격 현장의 파편들이 흩어져가는 과정을 쫓아가 볼 수 있었다. 먼저 우리는 하늘이라는 빈공간의 자연 또는 자연의 빈공간이 대도시의 메커니즘을 잠식해 들어가는 광경과 마주했고, 이어서 부서지고 일그러진 사물들이 죽음처럼 말하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 모두, 두 경우 모두 홍상현의 작품을 지배했던 것은 일종의 낯섦, 현실 너머의 어떤 비현실(나아가 환상)이 아니라 현실 이면의 ‘현실’ 또는 또 다른 현실이 나타나는 데에서 비롯된 낯섦이었다. 그 낯섦이 어떠한 경우라도 ‘사실주의적’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사실주의적 낯섦’은 분명 작가의 작업방식, 그보다는 차라리 공간과 사물들을 바라보는 방식으로부터 유래한다. 홍상현은 4×5인치 린호프 테크니카를 사용해 사물들을 포착하며, 지금에는 고전적이다 못해 고답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은염(gelatin silver) 프린트 방식으로 이미지들을 인화한다. 이번 “시간잉여공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는 촬영부터 현상을 거쳐 인화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가공도 하지 않는다. 그는 어떠한 의도적이거나 주관적인 조작도 거부한다. 아름답게 찍으려는 의도도 없다. 다만 자신의 시선을 어떤 지점들에 고정시켜 놓을 뿐이다. 이는 당연히 주관적인 행위일 수 없고(왜냐하면 시선을 가져다 둔다는 행위마저 없다면 공간 자체와 사물들 자체가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간과 사물들과 대화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전제일 수밖에 없다.
대형 카메라에 통과되어 나온 사물들의 은염사진들, 그 흑백 아날로그의 이미지들. 그것들이 가져오는―우리가 지금 감지하고 있는―질감, 그러한 종류의 것을 탐구하고 있는 사진작가는 오늘날 매우 드물게 되었다. 특히 작가가 30대 초반임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것을 추구하는 동년배의 사진작가는 이제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선명한 입체적 재질감은 놀라움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그 압도적인 재질감은 단순히 작가의 ‘미학적’ 탐색이 가져온 하나의 결과만은 아니다. 한마디로, 그 질감, 보다 정확히 말해 그 질(質)을 통해 사물이 사물 자체로서 말하게 되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일종의 충실성이, 사실에 대한 극도의 주의와 존중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일종의 극단적인 사실주의(리얼리즘), 공간과 사물들 앞에서의 겸허한 수동성, 공간과 사물들 안으로 계산 없이 몸을 던지는 행위, 행위 없는 행위, 타협 없는 엄밀한 수동성의 행위, 행위의 미니멀리즘, 한 마디로 단호한 침묵……
그로부터 홍상현의 작품에서 숨결이 명백하게 현전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뭐라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홍상현의 작품을 눈으로 볼 필요가 없다)―따뜻한, 고요한, 하지만 왠지 어떤 슬픔을 간직한 듯한 그 숨결은 작가 자신이 의도적으로 내보이고자 하는 어떠한 것도 아니며, 결국 사물들이 그에게 허락해 준 것이다. 시선의 숨결. 또한 사물들이 작가 자신을 통과해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시선의 숨결, 다시 말해 시선이 사물들을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그 숨결이 이전의 두 번의 전시, “건축공간변주”와“비극의 변주”에서 말했었고, 지금 여기의 “시간잉여공간”에서도 결국 말하고 있다. 이전 두 번의 경우 그 숨결이 어떤 낯섦들을 가져왔었고, 이번에도 결국 또 다른 종류의 낯섦을 현시(現示)시켜 주고 있다. 이번의 경우 그 낯섦은 공간이 시간으로 변하는, 다시 생성하는, 즉 공간이 시간화되는 이변에서 비롯된다.

2
공간은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대상들의 총합이 아니다. 공간은 그것들을 포괄하는 또 하나의 대상, 전체-대상도 아니며, 차라리 의식의 발효(發效) 이전에 주어지는, 주체가 사물들을 의식의 대상들로 포착하기 이전에 나타나는―전 의식적이고 전 반성적인―, 모든 경험의 조건이자 토양일 것이다. 공간의 그 비대상성(非對象性)을, 공간 자체가 주인(주체)이 되어 무엇보다 먼저 ‘내’ 안에 스며든다는 사실이, 다시 말해 ‘내’가 공간 앞에서 언제나 어떤 기분을 어쩔 수 없이 느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내’가 공간을 바라보고 공간으로 나가는 동시에 공간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공간은 우리 자신이 어쩔 수 없게, 우리를 수동성 속에 묶어두고 우리 안에서 퍼져 나가거나 울린다.
공간이 퍼져 나간다는 사건, 공간이 시선이나 의식에 고정되지 않고 일종의 에너지처럼 우리 안에서 공명한다는 사건. 그 사건이 남기는 징표, 보이는 공간이 남기는 보이지 않는 흔적, 그것은 공간적이지 않고 시간적인 어떤 것이다. 공간이 그렇게 시간의 자기 전개로, 시간적 울림(일종의 ‘음악’)으로 전환된다는 존재론적 사건에, 모든 사진 예술의 가능성(또는 불가능성)이 놓여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의심할 바 없이 공간을 재현(représentation, 또는 모방imitation)하는 대표적인 예술인 사진 예술의 핵심은, 가령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에게, ‘결정적 순간(instant décisif)’을 포착해야 하는―붙들 수 없는 시간을 붙들어야만 하는―움직임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은 말할 것도 없고 회화에 비해 보아도 보이는 공간과 그 안에서 보이는 것들에 더 붙박여 있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가장 재현적(모방적)인 예술인 사진의 가능성은, 가장 비재현적(비가시적)인 시간을 포착할 수 있는 가능성과 다르지 않게 된다. 반대로 사진예술의 불가능성은, 그것이 자체 안에 담고 있는 극도의 어려움은 시간을 붙들어 놓을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 놓여 있다. 가장 재현적인 예술인 사진의 성패가 가장 비재현적인 것에 매달려 있으며, 이는 사진이 재현될 수 있는 것과의 대비(차이) 아래에서 그 비재현적인 것을, 시간의 현전을 극적으로 드러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상현의 ‘시간잉여공간’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일련의 사진들은, 사진 예술 자체가 근거하고 있는 존재론적 사건(공간의 시간으로의 전환, 공간이 시간으로 현전함, 공간이 음악으로 응결됨)에 대한 탐색의 결과이다. 이 사진들은 사진 예술의 가능성의 가장 기본적인 근거를 다시 묻고 있다.
거기에서 어떤 공간이 ‘말하고’, 동시에 ‘울리고’ 있는가? 다시 묻는다면, 거기에서 어떤 시간이 ‘보이고’ 있는가?
그것은 폐허의 공간, 폐허의 시간, 보다 정확히, 폐허의 시공간이다. 물론 우리는 “시간잉여공간”에서, 이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사람들이 찾지 않는 무너져 내린 공간들과, 과거에 멈추어버린 시간, 즉 죽은 과거만을 반복하고 있는 현재와 마주하게 된다. 세워진, 구성된 공간이 아니라 ‘주저앉은’ 공간,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멈춰 선 시간, 폐허의 시공간, 그러나 그것은 이상하게도 폐허라기보다는 ‘살아 있는 자연’과 같은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그 시공간은 우리가 사물들의 사용 가치를 극대화시키기에 골몰하고 있는 일상의 시공간(우리가 욕구들을 만족시키거나 쾌락들을 얻기 위해 소비했던, 폐허 이전의 현실의 시공간)과의 대립을 주장하지도 않고, 폐허라는 것이 흔히 보여줄 수 있는 주관적 낭만성 또는 비극성(격정)을 부각시키지도 않으며, 무채색(‘무채색’, 그것은 “시간잉여공간”에서 보이는 것일뿐더러 보이지 않는 것이다)의 텅 빈 중심을, 이 도시에 내려앉는 잔잔한 어둠을, 그러나 체념이 아닌 비움을 현시시킨다. 사실 그 흑백의 빈 중심을 홍상현은 전작 “건축공간변주”에서 빌딩과 아파트 숲 중앙에, 이미지들 한가운데 위치한 하늘의 흰 빛으로 형상화해냈었다. 그러나 이번 “시간잉여공간”에서 그 빈 중심은 이미지들 중앙에 놓여 있지 않고 곳곳에 산재해 있을 뿐이고, 보다 정확히 말해, 가시적 형상들 안에 공간적으로 직접 드러나기보다는 다만 작품 자체의 시간으로서 우리에게 말하거나, 우리 안에서 울려 퍼진다. 작품 자체의 시간……, 작품이 우리 눈에 보여주고 있는 과거의 시간과 질적으로 다른, 우리가 언제나 이미 들어가 있는 살아 있는 시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 그러나 그것은 작가가 궁극적으로 마주하기를 원했던 시간일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의 익명적 시간이, 무명씨들의 삶이 아니겠는가? 어둠이 빛이 되고, 사라져 감이 나타남이 되며, 허물어져 감이 견뎌내고 긍정함이 되고, 비참함과 헐벗음이 영광이 되는 장소, 이름 없는 자들의 공간. 이 자본주의적 도시문명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 문명이 결코 침식해 들어갈 수 없는 (빈) 중심, 어떤 ‘자연’, 그 문명에 단순히 낭만적·비극적(격정적)으로 대립하지 않으면서 다만 그로부터 단호히 돌아서서 침범할 수 없는 것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단단한 중핵……

박준상(숭실대 철학과 교수)